[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한정찬의 무채 외 4편
무채
붉은 태양 아래,
하늘은 파랗고
땅은 초록이고
바다는 에메랄드다.
닮은 것은
색이 아니라
빛이었다.
태양이 검어지자
세상은
모두 같은
무채(無彩)였다.
추억이라 읽는다.
웃음 하나
식은 찻잔에
늦도록 남는 온기.
저녁은
우리보다 먼저 떠나고
시간은
버려진 순간들만
주워 간다.
먼 훗날
골목 하나가
이름을 부르면
우리는 비로소
오늘을
추억이라 읽는다.
파란 낙엽
길 위에 떨어진
파란 낙엽 한 장.
개미 두 마리가
철 이른 계절을 끌고 간다.
말복.
안전문자는
더위가 임계점을 넘었다고
손바닥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데,
저들은
세상의 경보를 모른 채
제 갈 길을 안다.
한참을 쪼그려
저들의 뒤를 눈으로 따라갔으나
끝내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파란 낙엽은
내 눈앞에서 조금씩
시간의 빛으로 말라갔다.
문득,
메마른 아프리카의 들판에
옥수수를 심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비는 끝내 오지 않아
줄기마다
허기만 자라났지만,
씨앗을 묻고
내일을 물 주던 그 시간만은
아무도 거두어 갈 수 없었다.
정말 세상은
수확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서
푸르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
바람이 스치고 간다.
살랑이는 숨결들
가슴 한곳에 작은 온기
새바람이 불어오면
조용히 마음이 깨어난다.
메마른 땅 위에 씨앗 하나
조용히 싹이 튼다.
무거움 속에도
숨겨진 온기.
그래서 난 오늘도
바람을 기다린다.
매미 울음
매미가 울고 있다.
짧은 여름 한 조각 퍼즐에
사랑을 맞추는 그 목소리다.
땅속 긴긴 기다림 끝에
딱딱한 허물 홀랑 벗었다.
하늘을 향해 기어 올라와
목을 놓고 울고 있다.
그리움처럼 사랑하는
한순간의 애절한 노래다.
한정찬
□ (사)한국공무원문학협회 고문, (사)한국문인협회원, (사)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한정찬시전집 2권, 한정찬시선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남펜문학상, 소방문화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