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아파트 있는데 생활비가 없다…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의 역설

집값은 올랐지만 은퇴 후 소득은 감소… 자산가치와 실제 생활수준의 괴리

초고령사회, ‘얼마짜리 집’보다 ‘매달 들어오는 현금’이 노후 안정성 좌우

[사진: 부부의 걱정스러운 재정 계획, 챗gpt 생성]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보유한 70대 A씨는 자산 규모만 보면 부유한 편이다. 오랫동안 보유한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주택 자산은 10억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은퇴한 A씨 부부가 매달 받는 연금과 기타 소득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넉넉하지 않다. 관리비와 식비에 의료비까지 늘어나면서 여행이나 여가생활을 위한 지출은 자연스럽게 줄였다.

 

‘집은 부자인데 통장은 가난한 사람.’ 이른바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House Rich, Cash Poor)’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란 주택을 비롯한 부동산 자산의 가치는 높지만 실제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이나 정기적인 소득은 부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집값 상승으로 자산 규모는 커졌지만 주택을 매각하거나 담보로 활용하지 않는 이상 오른 집값을 생활비로 바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시가 10억원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매달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이 200만원이라면 일상생활은 10억원이라는 자산가격보다 월 200만원이라는 현금흐름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재산은 많지만 소비할 돈은 부족한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은퇴한 고령층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경제활동기에는 월급을 받으며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자녀를 교육하면서 주택을 주요 자산으로 축적한다. 하지만 은퇴와 동시에 근로소득이 사라지거나 크게 감소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집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매달 들어오는 돈은 줄어든다.

 

문제는 생활비가 은퇴한다고 함께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식비와 관리비, 교통비 등 기본적인 생활비가 필요하고 나이가 들수록 의료비와 건강관리비, 돌봄 비용의 부담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물가까지 상승하면 보유한 현금과 연금만으로 생활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자산가격과 생활수준을 동일하게 보는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수억원의 주택을 보유했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은 가치가 높은 자산이지만 현금이나 예금처럼 필요한 순간 일부를 떼어 사용할 수 없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 문제는 개인의 소비에도 영향을 준다. 집값은 높지만 현금소득이 부족한 가계는 외식과 여행, 문화생활 등 선택적 소비부터 줄이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의료비나 가족 관련 지출이 발생하면 금융자산을 꺼내 쓰거나 대출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해법의 핵심은 ‘집을 팔 것인가, 보유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선택보다 부동산 자산을 어떻게 안정적인 현금흐름으로 연결할 것인가에 있다.

 

대표적인 방법이 주택연금이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주택 소유자가 거주를 유지하면서 주택을 활용해 매월 연금을 받을 수 있어 주거 안정과 노후 생활비 확보를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자녀가 독립한 뒤 넓은 주택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었다면 작은 주택으로 옮기는 ‘다운사이징’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주택 규모를 줄이고 발생한 차액을 예금이나 연금 등 금융자산으로 전환해 현금흐름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노후 자산의 구성 자체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뿐 아니라 예금과 투자자산, 임대소득 등 다양한 소득원을 마련하면 특정 자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특히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총자산만 계산할 것이 아니라 월평균 생활비와 의료비, 비상자금 등을 기준으로 필요한 현금흐름을 미리 계산할 필요가 있다.

 

세대 간 자산 이전 문제와도 연결된다. 부모 세대의 재산 대부분이 주택 한 채에 집중돼 있으면 자녀에게 자산을 이전하기도 쉽지 않다. 부모는 거주해야 하기 때문에 집을 처분하기 어렵고 자녀는 결혼과 출산, 주택 마련 등 자금 수요가 가장 많은 시기에 부모의 부동산 자산을 활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다.

 

초고령사회에서 ‘부자’의 기준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보유한 부동산의 가격이 자산 수준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은퇴 이후에는 매달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들어오는가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

 

하우스 리치, 캐시 푸어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집값이 높다고 반드시 노후가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이제 노후 자산관리는 ‘얼마짜리 집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자산이 평생 필요한 생활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가’를 함께 따져야 할 때다.

 

 

 

이기남 정기자 기자 ds3huy@kakao.com
작성 2026.08.27 15:23 수정 2026.08.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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