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음력 5월 29일 거북선이 최초로 참전했던 사천해전지가 어디인가에 대해 그동안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성 일대라는 설이 유지되고 있었다. 1960년대에 노산 이은상이 주장했던 내용을 아무런 비판 없이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해당 지자체가 그대로 차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노산 이은상은 사천해전이 벌어진 '사천선창'을 조선 후기에 선소가 있었던 선진리성 일대로 본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2025년 5월 역사문화학회에서 발행하는 KCI 등재 학술지인 '지방사와 지방문화'에 '임진왜란 시기 사천해전지의 위치 고찰'이라는 논문을 게재하여 사천해전지는 선진리성이 아니고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 옛 장암창지라고 밝혔다. 이런 결론을 내린 주요 근거 사료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과 주엽의 '증병조참판정공전',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 정경세의 '계문' 등이다.
당포파왜병장에는 사천해전지를 '사천선창'이라고 하면서 "왜군 400여 명이 산이 7~8리쯤 구불구불 이어진 높고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썰물 때는 판옥선의 출입이 어려워 밀물을 이용하여 공격하여 적선 12척을 격멸했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결정적 사료인 '증병조참판정공전(贈兵曹參判鄭公傳)'에는 사천해전지가 '사천의 장암(泗川之場巖)'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있다.
선진리성은 해안에 접한 곳이 400미터 정도이며, 해발 고도가 30미터에 불과한 낮은 구릉지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나오는 7~8리(약 3km) 정도 이어진 높은 산이 있다는 기록과는 전혀 다른 지형적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밀물과 썰물에 관계없이 판옥선이 들락거리면서 공격할 수 있는 곳이 선진리성 앞의 해안이다.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사천해전 전투 개시 초반에 적선 1척이 곤양에서 나와 기슭을 따라 도주하는 것을 조선수군이 추격하여 불태워 없앤 후 인근의 사천선창에 있는 적선 12척을 격파했다. 곤양 읍치 앞의 광포만에서 나오면 바로 앞이 선진리성인데, 이순신 장군이 그곳에 있는 적선 12척을 남겨두고 도주하는 적선 1척만 추격하여 깊숙한 내만까지 들어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필자의 논문이 나온 후 사천의 향토사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사천해전지를 다시 살펴보고 있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사천문화원의 사천학연구소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지역 언론도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사천 지역의 어떤 연구자는 필자의 논문에 대한 반박문을 3개 정도로 정리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첫째 장암창은 사천해전 당시 사천현 소속이 아니고 진주목 관할이라면서, 그 근거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내세웠다. 두 번째는 개전 초반 적선 1척이 나온 곤양은 지금과는 달리 당시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으며, 곤양 읍치 앞의 광포만 쪽에서 나온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축동면 구호리는 수심이 낮아 판옥선의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요지의 반박문이다.
필자의 논문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장암이 사천현에서 진주목으로 행정구역이 바뀐 시기는 1630년 전후다. 사천해전은 1592년에 있었으므로 그때는 장암이 사천현 소속이었다. 녹도만호 정운 장군의 전기인 '증병조참판정공전'에도 '사천지장암'으로 나온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과 정경세의 '계문'이다.
첫째, 반론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임진왜란 당시 장암은 진주목 소속이라고 했지만 사료를 잘못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 아니고 조선 후기의 대동지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국고전종합 DB'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아래쪽에 대동지지를 붙여 놓아서 사람들이 가끔 대동지지 기록을 동국여지승람 기록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40년 기록이고, 대동지지는 1800년대 기록이다. 남명 조식이 쓴 '유두류록'에는 1558년에 장암이 사천현 소속이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정 무오년(1558년) 초여름 나(조식)는 진주목사 김홍(⾦泓) 홍지(泓之)와 수재 이공량(李公亮) 인숙(寅叔)과 고령현감을 지낸 이희안(李希顔) 우옹(愚翁)과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李楨) 강이(剛⽽)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중략… 15일에는 다시 강이와 함께 장암(塲巖)으로 향했다. 강이의 서제(庶弟) 백(栢)도 따라왔다. 옛 장군 이순(李珣)의 쾌재정(快哉亭)에 먼저 올랐다. 얼마 뒤 홍지의 중씨(仲⽒) 경(涇)과 홍지의 아들 사성(思誠)이 따라왔고, 홍지는 끝에 왔다. 얼마 뒤 사천 수령 노극수가 땅의 주인으로서 찾아와(泗州守魯克粹 以地主來)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어주었다. 함께 큰 배에 올라 노 군은 술과 안주 및 음식을 실어주고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다음으로 1624년 정경세의 '계문'에도 사천 장암이 나온다.
"신은 당초 탑전에서 명을 받고 조정의 지휘를 직접 받았으니 ‘소민들을 효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놀라 흩어지지 않게 하고 선비들을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키라.’라는 것이었으며 …중략… 모집한 양곡은 조령에 가까운 각 고을은 가흥창으로 실어 보내고, 먼 고을은 각자 편리한 바에 따라 인동의 중지창, 성주의 무계창, 양산의 감동창, 사천의 장암창(泗川之塲巖倉)으로 운반하여 조운을 통해 서울로 들여보내 나라에서 사용하려 한다는 뜻으로 이미 여러 고을에 알렸으나 신이 올라온 뒤에 혹 해이해질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남명 조식과 정경세의 기록을 종합해서 보면, 임진왜란 때는 물론이고 1558~1624년 기간 동안 장암이 사천땅임을 알 수 있다. 장암이 사천현에서 진주목 관할로 바뀐 시기는 1630년 전후로 추정된다. 따라서 반론자가 주장한 내용은 근거가 없다.
두 번째 반론은 왜선이 나온 곤양 선창의 범위를 넓게 잡으라는 취지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잡록에 나오는 '당포파왜병장 초안'에 왜선이 곤양땅 태포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2025년 9월 25일 필자가 코스미안뉴스에 쓴 칼럼 '난중일기 잡록에 기록된 사천해전 초반 기록 검토'를 참고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이다. 반론의 요지는 장암창 앞이 수심이 낮아서 판옥선이 싸우기 어렵다는 논리로 보인다. 사천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도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힘들게 전투를 치른 내용이 장계에 있다.
사천만은 계속 퇴적이 진행되는 지형이므로 임진왜란 시기에는 현재보다 장암창 앞의 수심이 깊었을 것이다. 사천만 퇴적에 관한 내용은 이곳의 지리에 관한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나온다. '수치 고도 모델을 이용한 사천만 해안지역의 3차원 지형 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해당 내용이 있으며, 필자의 사천해전지 논문 참고문헌 목록에도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논문에 대한 수준 높은 반박문을 쓴 분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런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는 사천학연구소 김을성 소장이 제안한 것처럼, 사천시가 주관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여 사천해전지가 어디인지 밝혀야 한다.
[이봉수 논설주간]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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