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바구니에 담아둔 물건을 결제한다. 이게 정말 필요한지는 따로 묻지 않는다. 남들도 다 쓰니까.
회사를 옮길지 재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계산하는 건 연봉이다. 일의 값은 돈으로 매기는 거니까.
아이가 미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입에서 먼저 나오는 말은 "그걸로 먹고살 수 있겠니"다. 직업은 안정이 먼저니까.
오래된 친구가 곤란한 부탁을 해온다. 그런데도 거절하지 못한다. 관계는 지켜야 하는 거니까.
적금이 만기가 됐다. 어디에 쓸지보다 어디에 다시 넣을지를 먼저 본다. 돈은 불리는 거니까.
다섯 장면은 다 다르다. 그런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고민한 적이 없는데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교양이라고 여긴다. 먹고살 만해지고 시간이 좀 생기면 그때 들여다볼 것. 그런데 위의 다섯 장면에서 이미 무언가가 작동했다. 무엇을 먼저 두고 무엇을 뒤로 밀 것인가. 그게 철학이다.
그러니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나에게 철학이 있는가가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기준을 내가 고른 적이 있는가다.
대개는 없다. 그 기준은 부모에게서, 학교에서, 첫 직장에서 그냥 받았다. 받은 물건은 한 번쯤 꺼내서 확인해 본다. 그런데 받은 기준은 평생 꺼내보지 않는다.
라이언 홀리데이와 스티븐 핸슬먼은 『데일리 필로소피』에서 이렇게 썼다. "기계적인 반복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철학은 사색에서 끝나지 않는다. 점검이라는 말이다.
물론 모든 결정을 매번 다시 물을 수는 없다. 기준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건 대개 효율이다. 문제는 자동이라는 게 아니라 한 번도 따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답에 붙은 "~니까"를 소리 내어 말해 보면 된다. 남들도 다 쓰니까. 돈으로 매기는 거니까. 안정이 먼저니까.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대개 알게 된다. 이게 내가 고른 문장인지, 그냥 받아 쓰는 문장인지.
그다음은 둘 중 하나다. 확인하고 그대로 쓰거나, 내 말로 바꿔 쓰거나. 철학을 배운다는 건 철학자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 아니다. 남의 문장을 내 문장으로 바꿔 다는 일이다.
나 같은 수의사도 매일 결정을 내린다. 검사를 더 할지, 약을 더할지 뺄지. 교과서에 답이 다 있지는 않다. 마지막은 늘 무엇을 더 중하게 볼 것인가에서 갈린다. 의학이 아니라 기준의 문제다. 그런데 나는 그 기준을 오래 의식하지 않고 썼다.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꺼내 봤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그때껏 소리 내어 묻지 않은 질문이었다.
전부를 점검할 필요는 없다. 하나면 된다.
오늘 가장 빨리 내린 결정을 떠올려 보자. 망설임 없이 답이 나온 그 결정 말이다. 그 답에 붙은 "~니까"는 누구에게서 받은 것인가.
[박근필]
그로쓰 퍼실리테이터
읽고 쓰고 말하는 삶으로 당신의 성장을 돕습니다
박근필성장연구소장, 수의사, 작가, 칼럼니스트,
강연가, 커리어 스토리텔러
저서 : <할퀴고 물려도 나는 수의사니까>
<나는 매일 두 번 출근합니다>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방구석에서 혼자 읽는 직업 토크쇼>(공저)
<당신의 원고는 왜 계약되지 않는가>
독저팅, 필레터 운영
부산시청 공무원 200여 명 특강,
부산시교육청영재교육진흥원 교원 직무연수 외 다수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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