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은 뜻보다 힘이 세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럴까? 정(情)은 논리와 이치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소꿉놀이 친구는 정(情)으로 맺어진 친구이지 뜻으로 맺어진 친구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의 동네 소꿉놀이 친구들을 평생 잊지 못한다. 이렇게 정(情)은 어떤 논리나 이치보다 앞서고 힘이 세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범도 자기 새끼를 둔 골짜기는 안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포악한 동물이라도 핏줄이 일으키는 애정(愛情)은 어쩌지 못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정(情)이 논리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는 논리보다 감정이 우선이다. 절친한 친구가 권하면 내키지 않는 일도 하게 되는 이유 역시 뜻보다는 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도 이런 현상은 자주 일어난다. 과거에는 호남 푸대접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 되었고, 그 결과 호남사람들은 논리적 합리성보다 감정적 선입관이 앞서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제정치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923년 9월에 발생한 일본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방화했다” 등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천 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역사적 사실은 일본인들의 “조선인 혐오 감정”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극우세력이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사죄하지 않는 것은 혐한(嫌韓) 감정으로 양심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학살한 사실도 논리와 합리가 먹히지 않는 감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금도 서구 각국에 유대인만 별도로 수용하는 게토(Ghetto)가 있는 것 역시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게토는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법적으로 강제된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도록 한 특정지역을 의미한다. 이 게토는 유럽 각지의 도시에서 운영되었다.
로마 교황청 등, 당시의 권력기관들이 유대인 차별 정책을 강화하면서, 유대인들은 노란 모자와 스카프 등으로 신분을 표시하고, 좁은 지역에 밀집해 비참한 생활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정권은 폴란드 등지에서 유대인을 게토(Ghetto)로 강제 이주시킨 뒤, 집단 학살을 감행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런 게토 정책의 극단적 사례로서, 유대인 110만 명 이상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당했다. 게토는 단순한 거주 구역을 넘어,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동유럽, 중부유럽, 중동부 유럽”은 서유럽의 주변부였다. 식민주의적 정벌에 앞장 섰언 서유럽에 비해 자기들은 유순했던 백인이고 따라서 “착한 백인”이라고 자위하는 것은 그 주변부적 위치 덕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식민주의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점이, 중동부 유럽인들로 하여금 백인 우월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착한 백인”이라는 감정적 자부심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세계 2차대전 후 동유럽의 학계나 지식계에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식민주의 이후의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이 희박했던 것도 이런 착한 백인이라는 자부심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인종주의를 자본주의의 폐해로 환원시키는 냉전적 환원론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블록에 팽배했던 내재적 인종주의를 은폐하고, 사회주의적 인종주의가 보편적 평등의 구호 아래 공산주의 동유럽의 지식과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동유럽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착한 백인”이라고 자부하지만 동유럽의 “착한 백인”들도 19세기부터 식민주의적 욕망과 인종주의적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폴란드의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Bolesław Prus)는 그의 소설 『복수(復讎, revenge)』(1908년)에서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의 점령 아래 시달리는 영국령 아프리카 영토의 일부를 폴란드인들이 할양받아 원주민을 문명화시키고, 신천지를 개척하는 상상을 펼치고 있다. 즉, 폴란드도 식민지를 가졌으면 하는 소망을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착한 방관자들이 없을까? 여대야소(與大野小)라는 정국 속에서 다수의 힘을 믿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폭권(暴權)들을 방관하고 있는 착한 방관자들이 정말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라는 말이 진하게 와 닿는다.
-손 영일 컬럼
